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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차원높인,매

상담봉사를 하면서




***********************************************편지나 전화 기다렸을 독자와 함께
일일이 따뜻한 답장 드리지 못함을 양해 드린다.
자기 맘속의 보석을 나눠 가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듯이 자신에게 닥치는 고통 또한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나눠가질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달에 8시간의 상담자원봉사를 하면서 시대의 변화(가치관)를 남들보다 앞서 느끼고 있다.

신세대들의 일부 행동은 shock로 다가오고, 빠른 의식변화들 때문에 매달 상담 때마다 놀라는 중이다.

예전엔 여성, 특히 주부들의 애환이 많았는데 최근 2,30代 남성들의 고민도 많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의 발전도 보이고 있지 않은 여성들의 불리한 삶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 여성문제에 더 많은 관심의 비중을 두고 있다.

사실 상담내용은 공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부득이 마음아픈 어머니를 위하여 대강의 줄거리만 옮겨본다.

가슴에 찡하게 남아있는 한 사람, 30代 커리어우먼이 있다.

그녀는 남편보다 경제능력이 좋아 집이며 자동차며 늘 앞장서서 가족을 이끌어 갔다.
시댁이며 그 형제들 해줘도 해줘도 끝이 없고, 남편은 당연히 아내가 그런 사람인줄만 믿고 신경써 주지 않았다.

이런 것들과 권태가 쌓여 이혼을 전제로 별거에 들어갔다.
능력이 있으니, 시댁에 해줬던 것들 제껴 두고라도 자기혼자 살만한 아파트를 얻어 독립하였다.
계속해서 직장에 다녔고, 아빠와 살고 있는 중학생들인 남매 걱정에 수시로 반찬도 해서 날랐고, 이상형인 새로운 남자도 생겼다.

별거생활이 1여년이 넘고 양쪽 모두 결혼을 전제로한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이들은 부부를 묶어주는 끈으로서 제구실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다른 여성과 데이트를 할 때마다 우연찮게 딸아이는 전화로 "아빠 어디야?"를 물었고 그럴 때마다 얼렁뚱땅 대답은 하지만 갈수록
난감해지고, 한편 그녀 역시 자기재산 몽땅 줘도 후회하지 않을만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말이 오고갔다.
그 남자에겐 아들(중1)이 하나 있었고, 결혼을 하면 자기 애들 팽개치고 이 아이를 돌봐줘야 할 입장을 생각하니 그만 가슴이 서늘해졌단다.


여기에서 마음을 고쳐먹고 제발로 집에 들어갔고, 그렇게 마음이 뿌듯하고 편안하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역시 서로의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하고 예전보다는 잘한다고 한다.
이런 일들을 울고 웃으며 우리는 삶을, 여자의 일생을 얘기했다.

여자는 아이를 낳았다 하면 여자, 여성이 아니고 어머니이다.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돌보아 줄 책임이 있다(정신적인 부분이 아마 클 것이다).

그래야 어머니 자신이 편안하고 떳떳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회하는 어머니들도 더러는 있다.

아이들이 필요로 할 때 떠났다가 다 큰 뒤에 찾아내어 신세지는 어처구니 없는 어머니. 가슴깊히 허전한 구멍하나를 애써 잊으려 했을 뿐이지

결코 잊혀지지는 않았지 싶다.

사실 어머니가 아이를 두고 어디가서 어떤 행복을 누릴 것인가.

이렇게 위대한 어머니가 준비도 없이 되어, 살면서 느끼고 아파하며, 깨닫고 익어가고 있다.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조물주는 왜 여성에게만 아이로 인해 이토록 구속받게 하는가. 행복인가. 슬픔인가.
사랑의 댓가, 사랑의 형벌은 여성에게만 지나치게 크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아이를 위해서라면 다른 것에는 한없이 낮아지고 약해지고 바보같은 어머니. 그녀, 그녀들이 있어 세상은 따뜻하지만 결코 여성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덧이며 올가미이다. 이게 바로 여성의 한계이자 위대함인 것 같다.

적어도 결혼 전에는 평등했다. 결혼과 동시에 어머니가 되었다 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렇게 알면서 혹은 모르면서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
이제 여성들이 조금더 영악해지면 결혼은 하되 아이없이 살게 될지도. 아님 결혼자체를 기피하고 연애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똑똑한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은 것 같다.

고 김옥길 총장, 김정례 전 보사부장관, 소비자연맹 정광모회장 등등, 우리가 모르는 흙 속의 진주같은 여성들, 그들은 결혼에 대해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일까?

누구의 삶이든 통과의례 같은 크고 작은 암흑의 터널을 맞이할 때는 있다. 그럴 때 바다를 생각한다. 어머니는 바다고, 바다는 무한히 넓다. 썰물 밀물 시간을 스스로 지키고 구정물, 똥물, 쓰레기 다 받아 가라앉혀 맑은 물로 만든다. 흘러들어온 물에게 어느 강줄기에서 왔느냐 따지지 않는다. 짠맛이 평등하고 큰 파도가 아무리 높이 솟았다 꺽어져도 기뻐하거나 슬프하지 않는다.

아팠던 시절에 쓴 여성의 삶이자 내 삶을 "칼국수"란 詩로 쓴적도 있다.

누군가 그랬다 덤으로 산다고/ 정성을 덤으로 얹어보지만/ 제대로 된 맛을 내기란
쉽지 않았다/ 자연의 섭리는 어김없어서 속이/ 아플만큼은 아파야 하고 깊어질/
만큼은 깊어져야 여물게 되는/ 죽정이로는 살고싶지 않은/ 기둥같은 희망을 안고/
춥고 더울 때도 버틸 수 있었다/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든 쑥맥같던 과거/ 몇겹의
가식이 벗겨진 희디흰 몸뚱아리/ 산다는 게 가루가 되리라곤 믿을수 없었던 운명/
철부지같이 몸을 섞었다하여 가슴이/ 멍멍해지도록 칼침을 받았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는 손길 그 손길에 길들여졌을/ 슬프고도 아린 토막진 역사를/ 이제서야
뜨겁게 받아들인 오늘 새롭게 만나는/ 펑퍼짐한 의식을 켜켜히 잘라 맛깔스런
지혜로/ 울궈내기까지 아직도 어리석음의 가슴앓이는 끓고 있었다/

사랑이나 미움이나 다 감정적인 것이어서 판단능력이 흐려진다. 그러므로 그 문제 자체에만 매달리지 말고, 잠시 생각을 내려 놓고 자신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 볼 일이다.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에게서 정답을 찾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법이다. 남편이, 자식이, 친구가, 부모가 아니다. 따라서 자기가 자기를 가장 잘 안다. 自我이전의 (참)자기에게 모든 문제를 맡겨놓고 그 속에서 답을 찾을 때까지 지켜보는 것이다.

그랬을 때 삶의 고통을 자신이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게 된다.
즉 고통에 끄달리지(당하지) 않고 자신이 고통을 데리고 놀 수 있다고 할까.

결정(정답)은 스스로 내려야 옳은 답이라는 상담이론이 아니더라도 어떤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나만을 위한 선택보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주위,주변)"가 모두 좋은 쪽이어야지 혼자만 좋은 쪽은 금방 후회를 안겨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금 막 하느적 거리고 있는 코스모스를 보자. 한 그루 보다는 무리지어 피어있는 밭을 보면 누구나 아름답다고 감탄을 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자연과 같이 그속에서 부대끼며 아옹다옹 사는거지 뭐, 특별난 삶이란 없는 것 같다. 그 꽃밭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꺽어지고, 쓰러지고, 짓밟혀 죽어있는 꽃도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거름이 되고 새꽃이 피어나고 하면서 돌고도는 세상이 되는 것 같다.

자연은 결코 누구를 탓하지 않고 평화롭게만 보인다. (그렇다면 우린 식물만도 못한 인간?)

우리를 구속하는 것은 사실 없다. 우리 마음이 우리를 구속하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