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말씀을 듣다보니까 세계에 대한 이해가 드높아져서 마치 이대로 해탈해버릴 듯한 기분마저 듭니다. 그러나 독자들을 위해서 계속 세밀한 말씀을 여쭈어 보겠습니다. 제가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한 것을 먼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금방 스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주인공은 우리들의 근거이며 나무라 치면 뿌리와 같습니다.즉 최초의 원인자지요. 그리고 그 주인공은 삼계 모두의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不生不滅하고, 不增不減하며, 不垢不淨하지요. 주인공은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 모든 것을 떠나있고, 우리의 시작이자 끝이며, 우리의 원인이자 결과요,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우리는 그를 떠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와 함께 있으며, 그가 곧 나요, 내가 곧 그인 영원이며 무한입니다.
그런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더 나아가 모든 개체와 개체 사이)의 갈등이란 사실 우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나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니까요, 주인공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것들은 다 형제요, 자매입니다. 아니, 그대로 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큰스님께서도 언제나 상대를 둘로 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주인공에 대해서 모르고 삽니다. 그래서 그 중에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가하는 이도 많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로 대응하느냐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또 사회 윤리적으로나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가 바로 나라고 해도 그의 피해자가 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나아가 그런 악덕을 이 세상에서 몰아내는 것이 사회적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세상에서는 정의라고 하고, 그 정의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용기라고 합니다. 사실 그런 사회적 정의나 용기에 의해서 세상은 많이 개선되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의 원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대를 나 자신으로 봄으로써, 내게 닥쳐오는 것이 설사 악덕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악덕으로 상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지고(至高)한 아름다움과 숭고한 종교적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아직은 에고(ego)를 가지고 있는 중생으로서, 또 인지되어지지 않는 위대한 하나(주인공)보다는 우선 눈에 보이는 정의가 더 급한 것이 대다수 인간들의 삶입니다. 이 문제는 참으로 미묘하고도 심각한 문제여서 저도 일도양단의 해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만, 이에 대한 큰스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오직 불이법(不二法)을 지키며
"나는 부처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또한 나와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으로 굴려서 돌려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그냥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법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 큰스님의 진정을 헤아릴 때마다 저는 큰 감명을 받고 합니다만, 지금도 저는 가슴이 찡한 느낌입니다. 지금의 큰스님 말씀이 글자로 바뀌어 전달이 될 때에는 큰스님께서 지금 보여주신 그 간곡하심과 철저한 확신은 다 증발해 버리겠지요. 보통의 글에는 의미 전달만 있지, 그 뜨거운 분위기나 뉘앙스가 남지 않기에 말입니다. 큰스님과의 사사로운 접견에서 저는 큰스님의 지극 간절하신 내면을 느끼고 가슴이 메어지는 감동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만, 이런 기회가 보다 많은 불자들에게 제공되고 있지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의 일치된 가르침은 모든 것을 사랑과 자비로 되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은 그 기준에서 후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당신들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도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 주려 합니다. 그것은 그분들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기준(尺度)이지요. 그러나 중생들은 여러가지 기준을 세우고 (또는 기준이 없이) 카멜레온처럼 쉽게 변신하기가 예사입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떠돌게 되고, 따라서 삶이 고통이 되곤 하지요.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모든 경계를 둘로 보지 말라. 그 모든 경계를 주인공 자리에 되돌려 놓아라. 그리고 묵묵하게 하루살이로 살아가라 (순간 순간 처함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라).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을 큰스님께 여쭈어도 결론은 언제나 참된 마음, 간절한 자비심, 주인공을 향한 철저한 일심, 삼계를 하나로 보시는 확연한 삶의 시현(示顯)으로 귀일하십니다.
이런 큰스님의 면모에 대해서는, 저는 내내 감탄해 오고 있습니다. 사실은 말씀드리면 어떤 때는 그런 철저한 귀일(歸一)이 다양성의 결여로 느껴지는 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그런 철저하심에서 역시 중생과는 다른 확연한 세계가 큰스님의 내면에 성취되어 있음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부드러움과 자유자재하심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일미(一味)가 큰스님께는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당체가 그러하고, 스님께서는 그 당체를 보아버리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즉 여기에 사과 하나가 있다고 할 때 수천의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여기에 사과는 없다는 주장을 가지고 천만 가지의 의론과 자료로써 그들의 말을 증명하며 나를 설득하려 한다 해도 나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진리의 당체를 한번 체험하신 분들은 중생이 거짓된 견해에 사로잡혀 떠돌 때에도 언제나 일여(一如)하실 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러함'을 직접 보고 알아버리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분들은 수천만 명의 중생들이 뒤바뀐 인생관을 고집하더라도 결코 그에 끌려가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의연한 삶을 지켜나가시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의 증험자는 천만권의 경전을 능가하는 바 힘이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그런 증험자로 해서 경전은 하나의 가설(假說)일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벗고 글자 그대로 진리임을 증명받게 되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큰스님께는 그러한 면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일면 그렇게 큰스님께 감탄하면서도 저는 사실 아직까지도 큰스님이 '누구' 라고 단정짓지 못합니다. 지금도 '큰스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지만 어떤 내용을 지녀야 큰스님이며, 큰스님이라는 호칭이 적당한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너무도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시기 때문에 이런 분이거니 싶다가도 그 생각이 바뀌게 되고 금방 감탄했다가도 다시 회의하게 되고, 그랬다가는 다시 더 큰 경탄을 하게도 됩니다.
"(웃음)그게 아마 참말일 겁니다. 나만 그런가요? 우리가 사실 누구를 '진정으로' 알 수 있겠어요? 그렇게 알아가고, 배워가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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