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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목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하며

o心o 2006. 6. 4. 12:48
 

계를 지닌 사람은 어떤 악도 짓지 않고 복을 닦는 사람은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한다.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것은 곧 좋은 씨를 뿌리는 것이다.


아무나 선과 악을 함께 버리는 경지에 드는 것이 아니다. 선을 받들고 악을 버리는 수행의 오랜 세월을 통과한 자에게만 선과 악이 함께 사라지는 신천지가 열린다.


부처님한테는 ‘남’이 없다, 그러니 무엇을 베풀 때 주는 ‘나’가 어디 있고 받는 ‘너’가 어디 있겠는가?


아라한은 중국말로 무쟁(無諍)이다. 무쟁은 끊어야 할 번뇌가 없고 여윌 탐진이 없고 어기거나 쫓을 情이 없어서 마음과 경계가 함께 空하고 안팎이 언제나 고요한 사람을 말한다.(육조)


깨달음이란 없는 눈을 누군가로부터 얻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 눈을 제가 뜨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기의 입술에 매달려 살아왔다

                                     까닭을 알고 싶어서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나는 안에서 두드리고 있었다.(Rumi)

그렇다. 문은 있지만 바깥은 없는 곳이 해탈의 세계요 하느님의 나라다.


내가 없다{無我}는 말은 전체에서 분리된 독자적 자아라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인연에 따라서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인데 어디에 독립된 실체가 있겠는가? 이 진실을 깨쳐 통달한 사람,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보살이다.


인연 따라 쉼 없이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시체다. 그러나 움직이는 가운데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나는 모시고 있는가? 앉고 눕고 오고 가면서 중심에 정적(靜寂)을 유지하고 있는가? 물론이다. 그러면 나는 과연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앎’을 ‘삶’으로 살아내고 있는가?


깨달음의 세계는 空의 세계다. 유일한 실제인 ‘마음’의 세계다. 이 두 세계는 양과 질로 견주어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몸’을 가지고 저 ‘마음’의 알 속에 들어갈 것인가? 다시 세존은 대답한다. “우주 만물이(네 몸을 포함하여) 꿈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니 그것들을 꿈으로 물거품으로 그림자로 보아라. 그러면 저절로 집착이 끊어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사라지리니 그 자리에서 자기가 더 깨닫고 배울 것이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리라”

                         

                                        - <이 아무개 목사의 금강경 읽기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