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자유인으로 가는 길 12, 죽이고 살리는 법의 차이는?
*큰스님께서 보여주시는 신비한 힘은 사실 너무 은밀한 것이어서 거의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으려니와, 또 알려져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하나 듭니다. 예컨대 기적(신통력)에 대해서 부처님과 예수님은 아주 상이한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여 포도주로 만드셨고, 물 위를 걸으셨고, 병자들을 치료하셨고, 죽은 사람까지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을 행사하시지도 않았고, 또 원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식을 살려 달라며 울부짖던 고다미에게 대하신 태도에서 두드러져 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그녀에게 접시에 좁쌀을 모아 오라고 하셨지요. 그 대신 그 좁쌀을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에서만 모아 와야 한다고 일렀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은 없었고, 고다미는 생자는 필멸이라는 법칙을 이해하고 자식의 죽음을 조용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예수님 쪽이 아주 찬란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에 비하면 부처님의 방법은 가혹하기까지 합니다. 외아들을 잃고 비통해 하는 어머니에게 그 죽음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실로써 인정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진실은 어쩔 수 없는 진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걸 잘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생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나사로를 살렸지만, 그 나사로는 영원토록 살아있지는 못합니다. 결국 나사로에게 죽음은 잠시 연기된 것일 뿐 언젠가는 그도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육신의 죽음이, 육신의 고통이 없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육신의 죽음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나의 참 면모를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대비를 놓고 볼 때 큰스님께서는 어느 편을 택하시는지요?
작은 것 큰 것 둘이 아니다
"두 분 다 옳고 근본적으로는 부처님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현대라는 시기상의 특수성을 생각한다면 여러가지 방편도 필요하겠지요."
*가령 몸이 아픈 사람이 있을 때 병을 낫게 한다든지, 떠도는 영혼을 천도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중생계 안에서의 일이요, 불법의 궁극적 목표인 해탈과는 '직접적으로는' 관계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 그러니까 임시조치지요. 그러나 임시조치라는 말은 무의미하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그것 때문에 진화를 하고 차원을 높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만큼 진리 쪽으로 나아가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긴 안목에서 볼 때에는 그것도 구도와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군요.
" 내가 전에 나 자신에게 그 문제를 얼마나 묻고 물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찌됐든 다른 생각 아무것도 할 것 없이, 우선 당장 죽어 가는 사람은 살려 놓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용'이니 뭐니 이전에! 사실 조그만 것도 큰 것도 둘이 아니고, 내려서는 것도 올라서는 것도 둘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나는 중생들의 아픔을 보면 그대로! 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이게 잘못이라면 나를 장구벌레로 만든다 해도 좋습니다!' 나는 그렇게 다짐했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아 아무런 두려움도 거짓도 없습니다.
남을 안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의 과보로써 얻어진 법의 힘이라면 그것이 그렇게 쓰여질 까닭은 없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얻어진 것이겠습니까? 내가 가끔식 웃으면서 말하지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냥 갈 순 없잖아?' 하고 말입니다. 그 말이 쉬운 것 같지만 참으로 소중한 말입니다. 그냥 갈 수 없다는 것은 진실 때문입니다. 뼈저린 고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기에 그걸 건져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