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자유인으로 가는 길 9, 공부가 다음 단계에 이르려면?
*그렇다면 오신통과 마지막 신통인 누진통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아주 다릅니다. 오신통은 무심이 되지 않고도 간혹 얻을 수 있지만, 누진통은 무심 이후에야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또 누진통은 오신통 모두를 합친 것이면서, 그것들에게 질서를 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누진통이 성취되었을 때 오신통은 제가 있을 자리에 자리를 잡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모든 생명과 하나가 됩니까?
전체 생명과 함께 죽는 것
"그렇지요. 시공을 초월한 차원에 들게 됩니다. 대비심과 대지혜가 완성된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두 번째 단계에서 수행자는 크게 또 한번 죽는 셈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작게 죽는 것이라면 이번에는 크게, 아주 크게 죽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다는 말조차도 거기엔 알맞은 말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개인으로서 나로 죽었지만, 이번에는 전체 생명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크게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정작 신통력을 굴릴 수가 있어집니다. 언젠가도 얘기했었지요? 통 밖에 나와야만 통을 굴릴 수가 있다고요. 통 속에서는 통을 굴리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신통력도 그렇습니다. 신통력 속에서는 신통력을 굴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신통력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신통력이 나를 굴리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신통만으로는 도가 되지 못한다고요. 거기까지 '나 아닌 나'가 되지를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 아닌 나' , 모두의 아픔을 함께 하는 '나' 가 되었을 때, 그 '나'는 '우리 다 함께' 입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간이기에, 불성을 지니고 있기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입니다. '우리 다 함께' 복된 상태를 염원하는 보살만이 참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혼자서만' 복된 길을 찾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천만 가지로 뛰어다녀도 결말이 나지 않습니다. 오직 보살심, 오직 '우리 모두 함께 복된 길' 만을 통해서 나의 참된 행복도, 이 세상의 참된 행복도 성취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보살심으로, 이기심이 텅빈 상태에서야 비로소 신통력은 부려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그 신통력이 세상을 나쁘게 하는 쪽으로는 도무지 쓰여질 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자기 개인을 위해 쓸 수 있을까요? 자기 개인만을 떼어서 생각하는 습관은 이미 아예 사라져 버렸는데 말입니다.
그는 오직 더불어 좋은 일을 위해서 살기로 철두철미 되어졌습니다. 그건 요지부동입니다. 천지가 무너져서 먼지 알갱이같이 산산조각이 나도 그건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위협도, 그 어떤 유혹도 그에게는 통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위협을 두려워하고, 유혹에 넘어가는 따위는 근거인 미망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차원에서 신통력을 하나하나 점검해 나갑니다. 풀잎 하나, 벌레 하나까지 다 포함한 상태에서 하나하나 확인해 나가는 것입다. 그 기간이 십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야말로 보임이요, 만행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큰스님께서 산으로 다니시며 수행하셨던 10년이라는 기간은 그 기간이었습니까?
"............."
*알겠습니다. 그럼 거기까지가 2단계로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그 다음 단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렇게 수없는 체험과 점검과 만행을 하다 보면 마침내 그것이 크게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한 보살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보살은 이제 세상을 제도하려 나서게 됩니다. 물론 색신은 지니고 있지만, 그 색신으로서가 아닙니다. 색신과 물질로 제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으로서는 원융하게, 자연스럽게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마음입니다. 보살은 마음의 법리로써 세상을 건지게 됩니다."
*큰스님께서는 그 단계를 '크게 나투는 단계' 라고 이야기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마음으로써 하기 때문에 나툰다고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