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널강이어디있으랴

근본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

o心o 2013. 6. 12. 09:35

 내가 세상에 나고서 세상은 벌어졌다. 내가 나오면서 가정이 생겼고 상대가 생겼으니 이 세상 우주 전체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빼 놓고 무엇을 이 세상이라 하며, 무엇을 진리라 하겠는가?  보고, 듣고, 말하고, 앉고, 서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응대하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야 그냥 나일뿐이지 무어겠느냐?’ 싶을지도 모르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나’라는 것이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합쳐져 생긴 물질적인 결합일 뿐인가?  아니다. ‘현재의 나’를 형성시킨 나의 근본, 나의 뿌리인 진정한 내가 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없다고 단정 지을 것인가?

 

자동차는 운전자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아무도 자동차를 주인이라 하고 운전자를 하인이라 하지 않는다. 또한 집을 짓고 사는 이치를 보라. 우리가 그 속에 주인으로서 살고 있는 것이지 집이 우리를 만들어 놓고 그렇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하나의 껍데기이다. 육신을 움직이는 그 무엇은 따로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육신을 ‘실제의 나’라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사실, 헐고 닳게 되면 버려야 할 포대자루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안에다 이것저것 주워담고는 그것이 ‘나’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육신이란 입다가 낡아지면 갈아입는 옷처럼 영원하지 않으니 그 무상함을 지켜보라. 나의 생각 또한 영원치 않음을 지켜보라. 그렇다면 과연 나는 이 세상에 잠시 있다 사라지고 마는 허망한 존재인가? 苦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받다 사라지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한가? 아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주재자, ‘참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바로 ‘참나’인 주인공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오직 ‘참나’를 찾고자 노력해야 한다. 육신은 ‘참나’에서 나타난 싹, 잎사귀, 가지와 같은 것이거늘, 뿌리를 놓아두고 어찌 가지나 잎사귀를 자기라 할 것인가?

 

상대가 낮다고 해서 잘난 체 하지 말며 상대가 높다고 해서 자신을 업신여기지도 말아라. 항상 자비스럽게 같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 같이 나눌 수 있는 마음, 그런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

 

억겁부터 모습 모습 바꿔가며 살던 습의 종문서를 태산같이 짊어진 것 몰락 태워버린다면 창살 없는 감옥에서 홀연히 벗어나 자유인이 되리로다. 쯧!

강이 없는데 배가 있으며 배가 없는데 건널 게 있으랴. 그래서야 어찌 은산철벽 한 찰나에 뚫어 넘을 수 있나. -대행선사 선시 중에서-